행운에 속지 마라 (나심 니콜라스 탈렙)
★★★★☆
2010년 4월 초판 발행.
'블랙스완'으로 유명한 나심 니콜라스 탈렙의 평범하지 않은 작품인데, 실력 있는 번역자의 소회를 읽어 보아도 이렇게 난해한 글은 보기 드물었다는 평이었다.
저자도 서문에서 밝혔는데, 이 책의 내용을 편집하자는 편집자의 요청은 무시하고 저자 본연의 의지대로 내용을 썼다고 한다.
기존 낙관론자들의 생각을 대부분 부수고 있는데, 나름 논리적이어서 나쁘지는 않다.
난해함 속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부분들이 있다.
행운에 속지 마라
= 행운을 실력으로 착각하지 마라
= 당신의 소중한 인생을 운에 맡기지 마라
읽다 보면 '크게 성공하는 것보다 소소한 복리의 마법과 같은 인생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든다.
회의론자 탈렙의 경고를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있으며, 그의 경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티핑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zhhy550-gqw&t=19s
솔론의 경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행한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 즐겁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감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미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불확실하게 전개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신이 행복을 허락한 사람에게만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자제력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일한다면 누구나 넉넉한 인생을 살아갈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수준을 넘어서는 것은 단지 운에 불과하다.
엄청난 위험을 떠안든가, 아니면 이례적으로 운이 좋아야 한다.
적당한 성공은 실력이나 노력으로도 가능하지만, 크게 성공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어느 시점에 보면 실적이 탁월했던 사업가 대부분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무능한데도 엄청난 거부가 된 사업가가 넘쳐난다는 사실은 더 기가 막힌다.
하지만 이들의 실적에 행운이 또다시 작용하지는 않는다.
운 좋은 바보일수록 자신이 운 좋은 바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이들이 운 좋은 바보인 것이다.
험난한 현실의 룰렛
현실은 러시안룰렛보다도 훨씬 험난하다.
현실에서는 총알이 발사되는 경우가 더 드물다.
6연발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연발 권총에 총알 한 발이 들어 있는 것과 같다.
방아쇠를 수십 번 당겨도 아무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안전하다는 착각에 빠져 총알의 존재를 망각한다.
도박사, 투자자, 의사 결정자 들은 남에게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러시안룰렛은 정확한 확률 게임이라서 6을 곱하고 나눌 줄만 알면 누구나 쉽게 위험을 계산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총구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러시안룰렛을 하면서도, 그 게임이 '저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가 생성되는 모습에만 집중하느라 그 과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간과하게 되고, 실패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게임이 무척 쉬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평하게 즐긴다.
확률 계산에 정통한 과학자들조차 의미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총구를 볼 수 있어야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총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있어서까지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생존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이면 된다.
현대 생활은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몰고 가는 듯하다.
종교나 개인적 행동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성적이 되는 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처럼 운에 지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비합리적이 된다.
어떤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도 다행히 희귀 사건이 없는 표본 경로를 잘 만나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고약한 점은, 이러한 동물들이 희귀 사건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들은 희귀 사건에 취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다음 주 시장이 상승할 확률이 70%, 하락할 확률이 30%라고 가정하자.
하지만 상승한다면 그 폭이 평균 1%인 반면, 하락한다면 평균 10%라고 가정하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얼마를 버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이익이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 발생하는 이익 규모다.
승리 확률을 극대화한다고 기댓값도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작게 이길 확률이 높고 크게 잃을 확률이 낮을 때 더욱 그렇다.
만일 러시안룰렛처럼 낮지만 대형 손실 확률이 있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거의 모든 경우 승리를 거두다가도 어느 순간 결국 파산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집, 서재, 자동차가 동료의 것보다 크다는 이유로 자만심을 느낀다면, 이는 철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시한폭탄을 깔고 앉아 자신이 그 분야의 1등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극단적 실증주의, 승부욕, 빈약한 논리를 바탕으로 추론한다면 장차 커다란 재난을 피할 수 없다.
운에 대한 편향
1. 우리는 승자만 보기 때문에 확률을 보는 관점이 왜곡된다.
2. 엄청난 성공의 원인은 대부분 운이다.
3. 인간은 생물학적 장애 탓에 확률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쳇바퀴 효과에서도 벗어나기 어렵다.
즉, 부자가 되어 부자 동네로 이사하고 나면, 또다시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리게 된다.
여기에 심리적 쳇바퀴 효과가 가세한다.
풍요로운 생활에 익숙해지면 만족의 기준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재산으로는 절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가 행복에 관한 연구의 주요 과제가 되고 있다.
인간은 본래 합리적인 생각을 하기도 어렵고, 사회적 모욕감을 참기도 어렵다.
합리적 인간이 된다고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질을 거슬러가며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해도 아무 소용없다.
우리는 수많은 대체역사 가운데 실현된 사건 하나를 보고 이를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존편향은 실적이 가장 좋은 사건이 가장 눈에 잘 띈다는 듯이다.
왜 그럴까?
패배자는 모습을 감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낙관주의가 성공의 전조라고 말한다.
실패의 전조가 될 수도 있다.
낙관적인 사람들은 승산을 과신하기 때문에 분명 위험을 더 많이 떠안는다.
성공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유명해져서 전면에 등장하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분석에서도 사라진다.
충족을 추구하는 사람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충족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그는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았고, 충족을 얻는 순간 멈출 줄 안다.
목표를 달성해도 욕망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는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더라도 이에 따라 소비 수준을 끊임없이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탐욕스럽지 않기 때문에 충족할 줄을 안다.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율을 몇 %만 낮출 수 있다면 언제라도 이삿짐을 꾸리는 유형이다.
부자가 되고 나서 그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까다로워진다.
인과관계도 분명치 않다.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수준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인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이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운도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
감수의 글
이 책에서는 우리가 평상시에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점, 즉 역사주의적 결정론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리 앞에 벌어진 역사는 수많은 대체역사 가운데 우연하게 선택된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게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도 승자의 관점에서 정리되고 왜곡된 역사이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도 이럴진대, 다가올 미래의 역사에 대해서 어떤 예측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과거의 역사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결정론에 빠져 있다.
그리고 같은 관점에서 미래의 역사도 그런 식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주의적 결정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
즉 합리적인 회의론으로 접근한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가 수많은 대체역사 가운데 우연하게 선택된 것처럼 미래의 역사에도 우연성, 즉 운이 크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아니 예측하기에는 너무나 우연성이 크다.
그래서 과거의 통계를 근거로 함부로 미래를 예측하면 크게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